갑자기... 시리즈2015.03.12 06:21

2014년 6월 중순 주말...

날씨는 덥고 일은 잘 안되고,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소파에 누워 배에 노트북 깔아놓고 아무 의미 없이 이 사이트, 저 사이트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예쁜 아가씨가 스케이트보드를 멋지게 타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와... 난 주말에 기껏 한다는 것이 소파에 처박혀 오만상 찌푸리면서 인터넷이나 뒤지고 있는데,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자유롭게 놀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자니 너무 부럽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보고, 다시 리플레이해서 보고, 또 보고...

이 동영상을 처음 볼 때 일이 이렇게까지 크게 확대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생각해보니 중학교 때 개봉한 백투더퓨처 1에서 마이클 제이 폭스가 멋지게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질주하는 모습이 있었다. 미래 편에서 나오는 공중부양 스케이트보드가 아니라 과거로 갔을 때 바퀴 달린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장면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워낙 신나고 멋지게 나왔으니까.

▾ 지금은 파킨슨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마이클 제이 폭스가 1985년 Back to the Future 영화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모습


하지만 범생이 스타일로 초중고를 다닌 내가 학생주임 선생님께 맨날 기합받는 아이들이나 타고 다니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왜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어쨌건 자기검열 때문에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싶다는 생각은 가슴 저 깊은 곳에 봉인하였고 그 후로 20년이 넘게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위 YouTube 동영상으로 1985년에 묻어두었던 욕구가 2014년에 와서 그 봉인이 해제된 것이다. 흠… 마흔이 넘어서 스케이트보드를 처음부터 배워서 탄다? 일단 주변에서 이런 예를 본 적이 없고, 괜한 짓 하다 다치면 나만 손해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니, 뭔가 갑자기 해 보고 싶은 욕구는 이것 말고도 가끔 생기는데 항상 스스로 그 욕구의 싹을 자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안될 이유는 찾으면 항상 나온다. 항상 이렇게 무엇인가 돌발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의 싹을 싹둑싹둑 자르고 있다가 왜 갑자기 2014년 6월에는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건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주말 오후 내내 다른 스케이트보드 동영상을 찾아서 보고, 스케이트보드 종류에 대해 조사하며 신나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늦게 그나마 저렴한 플라스틱 재질의 크루저 보드(Cruiser Board)가 스케이트보드를 처음 타는데 가장 적합할 것 같아 하나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타지 않으면 아마 죽을 때까지 스케이트보드는 탈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십 대 때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 뭔가 복잡하게 따져볼 것이 아니라 큰 손해나는 일이 아니라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좋을 거야'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다.

다른 디지털 장비를 기다릴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택배를 기다렸고, 드디어 내 손에 스케이트보드가 쥐어졌다. 도저히 밝은 대낮에 탈 자신은 없더라. 깜깜해진 저녁 늦게 놀이터로 가서 조심스럽게 타봤다. 비틀비틀 보드 위에서 탈춤 추기 바쁘고, 땀은 비 오듯이 쏟아지고... 일주일을 밤마다 나가서 놀이터에서 연습하니 대충 한 발로 밀면서(이걸 푸시오프라고 한다) 똑바로 가는 것은 대충 하겠더라. 그래서 이제는 가다가 멈추는 연습을 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장난감이라고 생각했던 스케이트보드를 자꾸 아빠가 가지고 나가니 같이 타자고 아우성이고, 같이 나오면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스케이트보드를 양보해야 하다보니 실력 느는 속도는 더뎠다. 확실히 아이들은 빨리 배우더군. 며칠 타더니 대충 가고 서고, 턴 하는 것을 어느 정도 하길래, 아이들 핑계로 스케이트보드 교육을 무료로 해 주는 곳에 같이 가기로 했다. 뚝섬에 스케이트보드 연습장이 있는데 여기서 주말마다 무료로 강습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아들 이름으로 신청하고 어깨너머로 열심히  배웠다. 간만에 뭔가에 열중하며 열심히 했었던 것 같다.

▾ 아들과 같이 크루저 보드 강습에 참가한 모습




 그리고 8월 중순부터는 아침 일찍 일어나 6km가 넘는 거리의 회사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시간 30분 걸려 땀범벅이 되어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고, 레귤러 스타일로 푸쉬오프로만 주행하다 보니 왼쪽 다리는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딸내미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아빠가 창피하다며 부끄러워했다. 그래도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 남들이 뭐라고 하건 신나서 계속했었던 같다. 어쩌다 내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회사를 출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것저것 묻곤 했다. 처음에는 들키는 것이 창피했는데 시간이 흐르니 ‘뭐 어때?’라는 뻔뻔함도 같이 생기더라. 9월, 10월, 11월까지 타고 다니다 보니 이제는 속도로 많이 늘고, 푸쉬오프 뿐만 아니라 펌핑도 하게 되어 35분 이내로 주파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보드 위에서 댄싱을 한다든지, 각종 트릭을 하는 것은 관심도 없고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가고, 옆으로 틀고, 멈추는 것만 할 줄 안다. 그래도 재미있다. 힘을 빼고 타는 방법도 습득되어 이제 그다지 힘들지도 않게 탈 줄 알게 되어 회사 출근 정도는 어렵지 않게 타고 올 수 있었다. 다행히 3개월간 타는 동안 딱 한 번 살짝 휘청거리며 무릎에 살짝 무리가 가는 사고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큰 사고 없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지 싶다.

12월이 되니 추워서 타기가 어려워졌다. 슬슬 지겨워질 때도 되었고... 이렇게 반짝 이벤트성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또 한 번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진다. 주말에 한강에서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나는 크루저 보드를 타고 도서관을 가는데 "멋진 아가씨"가 빠른 속도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내 옆을 지나가는 것 아닌가? 모터가 달린 스케이트보드였는데 여유 있게 카빙턴을 그리며 멀리멀리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다시 맨 처음 본 동영상이 떠오르더라. 이 일에는 자꾸 멋진 아가씨가 등장한다. ^^

▾ 늘씬한 아가씨가 능숙한 솜씨로 질주하는 아래 동영상과 같은 느낌이었다.



전동 보드에 대한 속앓이가 시작되었고 10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의 "장난감"인지라 이번에는 많이 망설여졌다. 하지만 열심히 크루저보드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던 아내가 오히려 앞장서서 전동 보드를 사서 타보라고 부추겼고, 덕분에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주문할 수 있었다. 산타의 선물이었을까? 전동 롱보드를 들고 한강에서 타보니 또 다른 신세계가 펼쳐졌다. 한 번 충전하면 20km 정도 주행이 가능하니 되돌아올 것을 고려하면 10km 정도 갔다가 돌아와야 한다. 올림픽 대교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10km, 서쪽으로 10km, 한강을 건너 다시 동쪽으로 10km, 서쪽으로 10km를 다녀보니 너무 재미있는 것이다. 차로는 느낄 수 없는 자유,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는 즐거움, 그리고 무엇보다 적절한 속도감으로 내게 딱 맞는 놀이를 찾은 느낌이었다.

▾ 2014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 자신에게 전동 보드를 선물했다.

▾ 남한강 자전거길을 따라 열심히 타고 다녔다. 양수대교에서 찍은 사진. 한 시간동안 타는데 아무도 없었다. ^^


스케이트보드는 내 인생관도 조금 변질시켰다. 예전에는 무엇인가 선택하려면 가성비니, 기회비용이니 뭐 이런 것 주구장창 따지다가 제풀에 지쳐 그냥 포기하기 일쑤였는데, 그런 이성적인 가치판단보다 내 마음의 울림에 좀 더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끌린다면, 그 일은 좀 힘들어도 오래 할 수 있을 것이고, 오래 한다면 잘할 수 있게 되어 즐길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다. 행글라이더도 타고 싶어졌고, 요리도 하고 싶어졌고, 피아노도 배우고 싶어졌고, 커피도 한 번 직접 볶아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고 말이다. 짜증 나고 힘들 회사 생활이 "갑자기" 하고 싶은 일들에 의해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런 하고 싶은 일들을 차례로 하려면 회사 일을 잘 처리해 두어야 할 테니 회사일도 재미가 붙기 시작하고, 만사 복잡한 일들을 바라보는 예전의 삐딱한 시선도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오, 이런 만병통치약이!

그래서 "갑자기" 하고 싶은 일들을 차례로 "차분히, 조금씩, 계속" 해 보려고 한다. 이게 "갑자기" 시리즈의 탄생 비화이다. ^^ 
뭔가 대단한 목표나 목적은 없다. 그저 어느 날 갑자기 하고 싶은 일이 떠올랐고, 그게 내 마음을 울린다면 그냥 해 보는 것이다. 잘 되면 좋겠지만 어디 쉬운 일이 있겠는가? 그저 조금씩 꾸준히 해서 최소 3년간은 계속할 수 있는 일인지 보고 그렇다면 계속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모아두기 위해 "갑자기..." 시리즈를 여기에 정리한다.

그리고… 이 일의 끝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
세상일이 다 그렇다. 순례자 길을 끝까지 걸어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도 남은 일은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무엇을 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을 즐겼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냥 갑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지 목표도 방향도 없다. 그저 일상에서 순례자 길을 걷는 느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는 느낌으로 조금씩 천천히 즐길 것이다.

"갑자기..." 시리즈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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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etcome